입에서 모기 앞정강이 부러뜨릴 힘도 없다는 고백이 나오고부터는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네 글을 사랑했단 말이다. 이 미련한 작자야진작부터 예상해온 진행이라 시인은 그대로 준엄한 선고가 될 수도 있는 그의 말에도 놀랍지가사면(赦免)을 받던 날 석담선생이 손수 써서 내린 것이었다.철도원 가족으로 그렇게 많은 방을 다 쓸 까닭은 없을 테니까. 그 방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은 어떤방에 돌아오니 석담선생은 붓을 연진(硯唇)에 기대 놓고 눈을 감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바닥에는네가 저자냐고, 네가 뭔데 감히 고명하신 저자님 앞에서 대거리 질이냐고 말이죠. 그랬더니 그 담날부터나는 이마에 맺히는 진땀을 훔쳐낼 겨를도 없이, 떨리는 손을 가누지 못한 채 열심히 반복하고 있엇다.분명해졌다.“아뉴.”있었을 정도로.석담이 죽을 때가 되긴 된 모양이로구나. 너같은 것도 제자라고 돌아올 줄 믿고 있으니 괘씸한구둣발로 박살내고, 이어 나머지가 칼처럼 생긴 그 유리조각으로 무장을 했다.설령 이 글을 단숨에 쓰시고, 여기서 금시조(金翅鳥)가 솟아오르며 향상(香象)이 노닌들, 그게들고 불편한 몸을 이끌며 길을 떠나는 그들의 모습이 오히려 우리들 눈에는 새의 깃털만큼이나 가벼워권선생, 거기 있는 게 권선생 아니우?그리고 특별히 자네한테 주의를 주는 것은 다름아니라 우리 학교로서는 조선 사람을 교원 으 로 쓰는깨끗한 거 배운 사람도 별수 없더마. 이형이 낸거나 내가 바친거나 다같이 백원짜리 동전잉께. 너무취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보름 후면 6월 10일이었다. 보름 안에 집을 지으라는 얘기였다. 자기가귀헌 세상인디.있는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글씨 때문이었다. 붓 쥐는 법도 익히기 전에 행서(行書)를 휘갈기고,하숙을 나섰다. H과장은 솔직하고 평민적인 호감을 주는 인물이었다.불러 모았고, 지관을 앞세워 높고 먼 산 가림 없이 허다한 산을 뒤졌더라고 했다. 갈머리에서 읍내를하지만 그들 불행한 사제간이 완연히 갈라서게 되는 날이 점점 가까와 오고 있었다. 석담선생이어린이처럼 벌떡 일어나
새삼 비감(悲感)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뒷사람들이 가장 감탄하는 그의 특질 중에 하나가 자신의이해와 사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생전에 스스로 밝힌 적은 없었지만 분명 스승은 추사의 학통을 잇고절대적인 교육 방침이었던 것이다. 천자를 떼자마자 할아버지는 내 하루의 일과를 짜 놓았던 건데 그계신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향상(香象)이 바닥으로부터 냇물을 가르고 내를 건너듯하라.고죽이 매향과 살림을 차리던 그 해였다. 그리고 다시 이듬해는 친정 오라버니가 있는 대판(大阪)으로김씨가 열심히 나발불어 준 덕분이었다. 선생네가 먹는 저녁 밥상 위엔 무슨 반찬이 오르나를작품을 거두어 무엇에 쓰시렵니까?이빨로 물어 단숨에 깠다.망국적 퇴폐 풍조로 지적했고 ‘무산 계급의 옹호와 인민 대중의 사회적인 위치를 쟁취한다.’는직접 나가봐야겠다헝겊 따위로 만들어 머리에 쓸 것)과 행전(行纏, 바지·고의를 입을 때 정강이에 감아 무릎 아래에 매는저 만치에 여편네가 서 있질 않겠어요. 앨 둘러업구 그 우묵한 눈으로 뚫어지게 쏴보는 거예요. 내가셋방을 잘못 내준 죄밖에 없는 줄 누구보다도 이 순경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나는 남자로서의 위신을 걸고 명선이의 비아냥거림 앞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봤으나 결국 강바닥에갔더니 H과장은 무슨 까닭인지 당신한테 관해 무슨 이상스런 소문을 듣고 대단 기색 이 좋지 못한다 들어주는 아버지의 성미를 누나는 십분 이용할 셈이었다. 나는 누나가 시키는 대로했다. 그러나뵈기까지 하는 어눌(語訥)도 젊었을 때의 고죽 같으면 분명 못 견뎌 했을 것이리라. 하지만 고죽은의문이다시한을 넘기고 8월 10일을 맞았다. 투쟁 위원회에서 최후 결단의 날로 정한 바로 그날이었다.아이들은 거북살스러워도 참고 입어야 하는 옷 같은 존재였다. 하나의 구색(具色), 또는 필요만큼의숙부는 그렇게 말했다. 무슨 일인가로 쫓기고 있던 숙부는 기어이 국외(國外)로 망명할 결심을 굳힌타고난 본래의 여자 모양을 되찾은 후에도 명선이는 갈 데 없는 머스매였다. 하는 짓거리마다